

여수연대 활동가와 임원들은 여순 10.19 사건 발발 73년 만인 2021년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 된 후 두번째 맞는 추념식에 참석하고 고흥 지역의 희생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지난해 순천 광양지역 희생지 답사에 이어 고흥 지역을 답사하면서 여순사건은 단순히 특정 지역이 아닌 전남 지역 전체에 걸친 비극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펴낸 유적지 책자를 보니 양민학살이 밝혀진 곳만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끔찍한 희생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정부와 공권력에 의해 우리가 희생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 권력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큰아버지를 잃은 유족의 발언이 기억에 남습니다.
" 큰아버지 가신 후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 고향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큰아버지의 자손은 모두 힘든 삶을 살다 돌아가셨습니다. 장자인 큰아버지가 희생되어 제 아버지가 장자노릇을 하였습니다.
큰아버지는 청년회장으로써 마을 발전에 기여하셨고 밤이면 마을 부녀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부족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며 더불어 잘 살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여순항쟁 희생자 모든 분들은 숭고한 정신을 가진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역사는 이런 숭고한 분들의 희생으로 정의로운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믿습니다.
유가족회 활동을 하면서 실종 상태의 큰아버지가 법원에서 20년 형을 언도 받았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큰아버지가 살아 돌아 온 듯 기뻤습니다. 그 무렵 제 꿈에 30여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타나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저세상에서도 큰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나 봅니다.
여순항쟁은 75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75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이 태어나 생을 마감하는 시간입니다. 여순항쟁 희생자들은 대부분 20세 전후의 어린 청춘들이었습니다. 마을 앞 광장에서 무시무시한 감옥 벽 앞에서 찬바람 부는 들판에서 처참하게 저 세상으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 때 저의 큰아버지는 20세의 젊은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느닷없이 맞닥뜨린 죽음 앞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과거는 잊어야 할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만든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큰아버지 묘 뿐 만 아니라 많은 희생자들의 묘도 가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급선무는 실종 상태 희생자들의 시신을 찾는 것입니다. 여순항쟁 희생자들이 미소 띤 얼굴로 유가족의 꿈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하루빨리 시신을 찾길 바랍니다.
슬픔의 무게가 너무 크면 슬픔의 감각조차 무뎌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엿공장을 운영하던 김병순이라는 분은 마을에서 좌익활동을 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엿공장에서 엿을 먹고 간 일로 반군에 협조했다고 경찰에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람 목숨을 함부로 빼앗은 학살의 현장입니다.




여수연대 활동가와 임원들은 여순 10.19 사건 발발 73년 만인 2021년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 된 후 두번째 맞는 추념식에 참석하고 고흥 지역의 희생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지난해 순천 광양지역 희생지 답사에 이어 고흥 지역을 답사하면서 여순사건은 단순히 특정 지역이 아닌 전남 지역 전체에 걸친 비극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펴낸 유적지 책자를 보니 양민학살이 밝혀진 곳만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끔찍한 희생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정부와 공권력에 의해 우리가 희생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 권력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큰아버지를 잃은 유족의 발언이 기억에 남습니다.
" 큰아버지 가신 후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 고향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큰아버지의 자손은 모두 힘든 삶을 살다 돌아가셨습니다. 장자인 큰아버지가 희생되어 제 아버지가 장자노릇을 하였습니다.
큰아버지는 청년회장으로써 마을 발전에 기여하셨고 밤이면 마을 부녀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부족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며 더불어 잘 살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여순항쟁 희생자 모든 분들은 숭고한 정신을 가진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역사는 이런 숭고한 분들의 희생으로 정의로운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믿습니다.
유가족회 활동을 하면서 실종 상태의 큰아버지가 법원에서 20년 형을 언도 받았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큰아버지가 살아 돌아 온 듯 기뻤습니다. 그 무렵 제 꿈에 30여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타나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저세상에서도 큰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나 봅니다.
여순항쟁은 75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75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이 태어나 생을 마감하는 시간입니다. 여순항쟁 희생자들은 대부분 20세 전후의 어린 청춘들이었습니다. 마을 앞 광장에서 무시무시한 감옥 벽 앞에서 찬바람 부는 들판에서 처참하게 저 세상으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 때 저의 큰아버지는 20세의 젊은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느닷없이 맞닥뜨린 죽음 앞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과거는 잊어야 할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만든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큰아버지 묘 뿐 만 아니라 많은 희생자들의 묘도 가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급선무는 실종 상태 희생자들의 시신을 찾는 것입니다. 여순항쟁 희생자들이 미소 띤 얼굴로 유가족의 꿈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하루빨리 시신을 찾길 바랍니다.
슬픔의 무게가 너무 크면 슬픔의 감각조차 무뎌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엿공장을 운영하던 김병순이라는 분은 마을에서 좌익활동을 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엿공장에서 엿을 먹고 간 일로 반군에 협조했다고 경찰에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람 목숨을 함부로 빼앗은 학살의 현장입니다.